기억을 먹는 아이

공원 의자에 앉아 건성건성 책장을 넘기고 있던 내 옆에, 아이가 앉았습니다.
아이의 이는 일부러 쇠줄로 정성껏 간 것처럼 뾰족했습니다.
"난 뭐든지 씹을 수 있어요."
"그래?"
아이는 입을 벌려 이를 보여주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습니다.
"아무거나 주세요. 내가 먹어 줄게요."
"미안. 난 지금 줄 게 없는데."
이노옴, 과자를 먹고 싶었나 봅니다.
그런데 공손하거나 아양을 떨기는커녕
오히려 선심 쓴다는 듯 '먹어 준다'니,
조금 괘씸해졌습니다.
"과자는 식구들한테 사 달라고 해라."
"과자 같은 거 말구요. 아무거나요.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하는 거, 없어요?
난 뭐든지 씹을 수 있다니까요. 내가 먹어 줄게요."
때마침 달마시안 한 마리가 촐랑거리며 지나고 있었습니다.
나는 아이를 놀려주려고 달마시안을 가리켰습니다.
"저거."
놀랍게도 아이는 '개를 어떻게 먹냐'며 우는 대신
순식간에 달마시안을 꼭꼭 씹어 삼켰습니다.
주인이 뒤따라와 이름을 부르며 찾을 땐,
이미 달마시안은 흔적도 없이 아이의 뱃속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또? 뭘 먹을까요?"
천진하게 나를 바라보는 아이를 보니 오히려 무서웠습니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나는 자꾸 "아무거나 달라"고 재촉하는 아이에게
내가 들고 나온 책이며 의자, 은행나무 따위를 손가락으로 대충 가리켰고
아이는 그것들을 조용하고 빠르게, 그리고 아주 쉽게 꼭꼭 씹어 삼켰습니다.
눈 앞의 일이 현실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이제 나는 무서워서 다리를 덜덜 떠는 바람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지경이었습니다.
순간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꿈이 아니고서야 모든 것을 쉽게 먹어치우는 아이 따위를 만날 리 없었습니다.
꿈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용기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공원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의자는 아이가 먹어버렸기 때문에-
아이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다 먹을 수 있다는 거지. 뭐든지?"
"응. 네."
"저기 나무들 위로 건물 보여? 저런 것도 먹을 수 있어?"
"먹어 줄까요?"
"오, 안 돼."
"없어지길 바라는 걸 말해 봐요. 먹어 줄게요."
나는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이는 말 없이 한참이나 생각에 빠진 나를 얌전히 기다려 주었습니다.
"기억 같은 것도 먹을 수 있니?"
"그럼요."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게…… 순 기억들이야."
"그런 사람 많아요. 많이 먹어 봤어요."
"하지만 기억을 어떻게 먹지?"
눈 앞에서 달마시안, 책, 나무 따위를 모두 씹어 삼키는 것을 보고서도
막상 기억을 먹어줄 수 있다니 버럭 화가 났습니다.
나는 말도 안 되는 괴상한 꿈을 꾸고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기억을 어떻게 먹냐'는 나의 추궁을
단순한 질문으로 이해한 모양이었습니다.
"얘기해 줘요. 그럼 먹을 수 있어요."
"내가 너한테 얘기만 하면……?"
"먹어줄게요."
나는 시험 삼아 사소한 기억 하나를 말했습니다.
중학교 때 문구점에서 볼펜을 훔치다 걸려 망신을 당한 일이었는데
-이것은 후에 그 아이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나는 정말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이는 그 기억을 보란듯이 꼭꼭 씹어 삼켰고,
나는 그 순간부터 내가 그런 짓을 한 적이 있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맙소사."
나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가슴이 벅차올라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기억을 먹어 주다니.
"조금만 기다려 줘. 잊고 싶은 기억이 많아."
아이는 좀전처럼 얌전히 기다려 주었습니다.
나는 서둘러서 이런저런 기억들을 떠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떠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기억들 투성이었지만
그쯤 견딜 수 있었습니다. 이제 잠시 후면
어차피 이 아이가 모두 꼭꼭 씹어 먹어 줄 테니까요.
아이는 기다리는 것이 조금 지루해졌는지
아이답지 않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기억을 먹을 수 있어요.
당신의 기억도 내가 삼켜 줄게요.
다시는 꺼낼 수 없게 먹어 줄게요, 내가.
(2007.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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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체코나 독일의 무서운 민담 같다는.
이런 거 생각해 내는 거 보면 대체님, 천재같아.
부러워요.
원 별 말씀을 다... 넙죽넙죽;;
슬퍼요. 나도 잊고 싶은게 많아요. 아직 만나이로 10대지만.. 잊고 싶은게 많아요.
조카님 기운 내시어요
따뜻하게 위로받는 느낌이 들어요.
그림 때문일까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좋네요! 'ㅅ^
이런 엽편들을 시리즈로 엮어볼까 하는데
언제나처럼 생각만 하고 있어요 -.-
언젠가 저 꼬마애가 저한테도 나타났으면 좋겠네요.
먹어줬으면 하는 기억이 한가득이라구!
p.s 오랜만의 등장 'ㅅ'
워~ 반가워요 h군님!
그러고보면 h군님도 참 오랜 지인 ^^
일본 애니 몬스터속의 한 동화가 생각나네요 ;;
몬스터에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었나요? 'ㅅ'
저 아이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나요? 안좋은 기억을 저 애가 다 먹어주면 그 안에 남는다거나...;ㅁ;
염려 고맙습니다.
꼭꼭 잘 씹어 먹고 있길요. :)